2007년 10월 29일
칸트의 입장에서, 정신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럴 것임.
'정신이란 무엇인가'
산
현대인은 흔히들 ‘자아’라는 것을 ‘신체’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 역시 신체 활동의 부산물 즉, 뇌가 활동하는 것의 부산물로서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은 정신을 그저 신체 활동의 부산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무엇인가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각종 재해나 안타까운 사고로 인하여 신체가 훼손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사고의 당사자를 여전히 과거의 그 사람으로 인식한다. 성형 수술을 하여 몰라보게 얼굴이 달라진 경우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과거의 그 사람으로 인정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정신만이 존재하는 형태인 여러 가지 ‘신’들을 믿는 사람들이 많고, 그를 믿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고, 조상신을 받들어 모시느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인격’의 개념은 어떠한가? 사람 A가 사람 B에게 욕이나 험담을 할 때에, 우리는 A가 B의 신체를 실제 훼손하거나 어떻게 한 것은 아니지만 A가 B의 인격을 모독했다고 말한다. 사람 A가 이제는 죽고 없어진 위인 B의 동상을 훼손했을 때에도 A는 B의 실제 신체가 아닌 동상을 훼손했을 뿐이지만, A가 B의 인격을 모독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실체를 오로지 ‘신체’로만 정의하고, 정신을 다분히 신체 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벌어지기 힘든 현상이다. 이렇듯,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실체를 규정하는 핵심 근거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연구보고서’를 통하여 정신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본인의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수업시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정신’을 실체로서 내세운 철학사를 “요약”해보고 경험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정신의 실체로서의 지위가 무너질 뻔했던 과정과, 정신이 실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극단적인 문제 상황을 점검해보고, 이런 상황에서 칸트의 선험적 사고 형식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2. 데카르트 - 실체로서 정신을 주장하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나=생각하는 존재’라는 확실한 명제에 정초하여, 그는 계속해서 명석 판명한 인식들을 찾는 노정을 밟는다. 하지만 그의 노정은 사실상 기독교적 전통의 창조와 자유 의지의 신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지정하고, 신의 “진실성”에 의존해 ‘물체’의 존재마저 납득해 버리는 과정이 되었다.1) 근대의 문을 열었다가 사실상 고․중세로 다시금 후퇴해 버린 것이다. 신의 “진실성”에 의존하여 물체의 존재가 인정되자, 데카르트는 두 실체론을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2) 정신과 물질이 각기 독립적인 법칙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의 실체 정의에 따르면 오로지 신(deus)만이 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3)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신이라는 “무한 실체”에 대하여 이른바 “유한실체”라는 ‘물질적 실체’와 ‘의식적 실체’는 각각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적 의미로 ‘실체’라고 주지한다.4)
다른 의의는 차치하더라도 데카르트의 생각은 확실히 다른 어떤 것-이를 테면 ‘신’-에 기반하지 않고서 ‘자아’의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 자아의 본질은 정신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용어 선택을 불명료하게 함으로써, 종국에는 그의 사상이 근대철학사에서 지니고 있는 의의 즉, 정신의 실체로서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였고 따라서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기회를 일정부분 없애버리었다. 문제점의 첫째는,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정신’을 구별해내고서도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적어도 지각 활동에서는 신체 의존적임을 실토함으로써 결국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님을 말하게 된다는 점이다.5)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곧 의심하고, 통찰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6)고 대답한다. 여기서 ‘감각’이 문제가 된다. 신체 없이 내가 감각할 수가 있겠는가? 눈을 통하지 않고서 사물을 보고, 코를 통하지 않고서 냄새 맡기란 불가능하다.7) 그리고 이는 ‘그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데카르트 자신의 실체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모순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사용한 ‘존재’ 개념은 마치 그 개념이 함축하는 바나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마치 자명한 것처럼 특별한 분별없이 사용되었다.8) 그는 실체를 세 가지로 규정했다. 따라서 각각의 실체 별로 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을 할 때는, 그 때의 ‘실체’란 어떤 의미인지 밝혀주어야 함이 옳을 것이다. ‘신이 있다[존재한다]’와 ‘책상이 있다[존재한다]’와 생각하는 것으로서 ‘내가 있다[존재한다]’에서의 각각 ‘있다[존재한다]’의 의미는 모두 같은 뜻 일까?9) 데카르트는 이에 대하여 뚜렷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지만, 이러한 그의 ‘실수’는 뒤를 이어 등장한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논박당하게 된다.10)
2. 로크 - 경험주의적 공격
로크는 정신이 본래부터 있는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반대하여, 우리 정신이 생각하는 모든 관념은 모두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생각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역시 ‘정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있다’는 데에는 동의를 한다는 점이다.
로크는 ‘실체’를, 감각에 의한 것이든 반성에 의한 것이든 마음에 주어진 단순 관념들이 “그 안에 존속하고, 그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기체(基體)”11)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 단순 관념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성질들, 즉 보통 우연적인 것들이라 일컬어지는 그런 성질들을 담지하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단지 가정된 것”12)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하는, 그 지속적인 것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성질들을 담지하는 것, 단지 가정된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것”13)이라고 부연하기도 한다. 감각에 의한 단순 관념들을 일으키는 성질들이 귀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어느 누구도 무엇인지 모르는 어떤 것”14)이라는 로크의 실체 개념은 분명 우리에게 드러나는 외적 사물의 기체를 지시한다.15)
위와 같이 복잡하면서도 모호하게 실체를 정의한 로크는, 그에 토대하여 세 실체로 신, 유한한 정신들, 물체들을 상정한다. 이 때, 로크의 실체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이로써 로크는 한 자아 내부의 마음과 몸, 그리고 마음들과 몸들 사이의 ‘개체성’과 ‘자기동일성’의 문제까지 파생시킨다. 그러나 본 ‘연구보고서’에서 본인은 과연 한 개인에게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때 정신은 어떤 의의가 있냐는 것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려하는 바, 로크의 실체 개념에서 볼 수 있는 ‘개체성’과 ‘자기동일성’을 한 개인 내부 즉, 자아 안에서의 ‘자기동일성’ 문제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시키겠다.
3. 흄 - 자아 부정
흄은 한 개인 안의 ‘자아’ 안에서도 ‘자기동일성’이란 지켜지지 않다고 논증함으로써 자아를 부정한다. 분명 우리에게 ‘자아’라는 관념은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자아’라는 관념이 있다. 즉, 내가 체험하는 일들이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자아’가 있는 것이다. 글을 쓰며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를 원망도 해보고 존경스럽다며 우러러도 보는 ‘내’가 과연 ‘내’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비록 1살 때의 ‘나’를 기억할 수 없고, 기억이 나는 6살 정도의 일부터도 뜨문뜨문 기억이 나기 때문에 나는 태어난 이 순간부터 21살인 지금까지의 나의 기억을 쭉 이어져 온 어떤 ‘선’으로 명석 판명하게 그려내기는 어렵다. 사실 만일 그렇게 그려낸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21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기억을 해낸다고 해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억과는 별개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모든 감정과 경험을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내’가 하고 있다고 지각하고 있다.
그러나 흄은 우리의 모든 관념이 지각(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자아’의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은 무엇인지, 과연 그러한 인상이 있는 것인지 집요하게 질문한다.
“모든 각각의 실재적인 관념을 낳는 것은 어떤 하나의 인상(impression)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아 또는 개인은 하나의 인상이 아니다. 우리의 여러 인상과 관념들이 자아 또는 개인과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만일 어떤 인상이 자아의 관념을 낳는다면, 그 인상은 우리 삶의 행보 전체를 통해 변함없이 동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자아가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니까 말이다. 그러나 변함없고 항구적인 인상은 없다.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 열정과 흥분은 번갈아 일어난다. 이들 모두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자아의 관념은 이 인상들 중 어느 것에서, 또 다른 인상에서 도출될 수 없다.”16)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실체’라고 말할 때 고정불변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한다. 자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자아를 정신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아에 대응하는 고정불변적인 하나의 정신이 있는 것일까. 막연하게 우리는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정신을 이루는 “인상”을 자아의 근거로 가정하고 본격적으로 생각해 들어가면 ‘변함없고 항구적인 인상은 없다’는 흄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나 자신’이라 불리는 것에 아무리 깊게 들어가 보려해도 내 발부리에 채이는 것은 항상 뜨거움이나 차가움, 밝음이나 어두움, 사랑이나 미움, 고통이나 즐거움 같은 개별적 지각들 뿐이다. 그 어느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을 잡아낼 수 없고 그러한 개별적 지각 외에는 어떠한 것도 관찰할 수 없다.”17)
변함없고 항구적이기는 커녕,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했던 나의 정신은 개별적인 지각일 뿐이다. 따로따로 구분할 수 있는 개별적인 지각이 자아를 이루는 것이라면, 16년 전 어른들이 주는 오백원짜리 동전을 보며 ‘즐거워했던’ 나와 지금 오백원짜리 동전을 보며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는 확연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것이다. 사태가 이럴진대, 어떻게 16년 전과 현재의 나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흄은 개별적인 지각들을 하나의 지각으로 묶어서 그것을 하나의 정신 즉,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과 관계와 기억에 기반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말한다.18) 예를 들어 ‘산’이라는 사람이 오른발을 가지고 축구공을 차는데, 동시에 ‘강’이라는 사람이 박수를 쳤다고 하자. 이윽고 공이 움직인다. 여기서 우리는 ‘산’이 오른발로 축구공을 찼기 때문에 공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강’이 박수를 쳤기 때문에 공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하여 흄은 사람들이 경험상 A와 유사한 것들이 일어난 후 B와 유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나서, B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면 A와 유사한 일이 B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게 하였다고 즉, “강제”하였다고 상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A와 유사한 것들과 B와 유사한 것들 사이의 ‘변함없는 관련’일 뿐이다.19) 이러한 변함없는 관련일 뿐인 것을 인간은 필연적인 다시말해, 강제적인 ‘인과 관계’로 착각하고, 이를 자아에도 똑같이 적용시킨다는 말이다.
4. 자아가 해체된 뒤 남는 문제
흄의 논의를 통해 고정되고 불변적인 상으로서의 자아는 해체되어 버렸다. 그런데, 자아로서의 정신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고 하면 즉, 의식이 동일하지 않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의식이 동일하지 않다면, 의식이 매순간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바로 그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신체를 소유한 사람이 벌이고 있는 행동이지만, 매 순간 다른 정신에 의해서―고정된 자아가 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자아라고 말해서도 안 되겠다―벌어지고 있는, 각각의 개별적인, 구분되는, 서로 관련 없는 행동인 것이다. 지금 내 앞에 한 사람―나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그의 신체로 보아―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물을 마시더니, 화장실을 가고 이제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하지만 흄의 자아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이 행동들은 모두 서로 다른 자아의 행동일 뿐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의 행동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그는 그가 그러한 문제 있는 행동을 할 때와, 비록 신체는 똑같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똑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가 정신에 행동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할 수가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정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외부의 환경, 특히 DNA,에 의해 결정된 행동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외부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답을 내리기가 상당히 모호해 진다.
어느 여름날 시카고에서 두 소년이 한 어린 친구를 태웠다. 두 소년은 누군가를 살해하기로 결심했지만, 누구를 죽일지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살인 계획의 주동자인 리처드는 차에 태운 어린 친구의 머리를 끌로 내려친 후, 피가 철철 흐르는 시체를 뒷좌석으로 옮겨 담요로 덮었다. 그 후 두 소년은 잠시 근처를 배회하다가, 시체를 시가지 밖으로 가져가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옷을 벗기고 도시 남쪽 20마일 지점에 유기했다.
일을 끝낸 소년들은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네이선의 집으로 가서―범죄에 쓰인 자동차는 밖에 주차하고―그날의 모험에 관해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매우 허술하게 청소한 뒤 자동차 대여 업소에 반환하고 각자 볼일을 보러 갔다.
당연히 그들은 체포됐다. 한 소년이 시체를 버린 자리에 특이한 뿔테 안경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소년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심문 과정에서 곧 엉망으로 꼬였고, 그들은 범행을 자백했다.20)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은 소년들에게 뚜렷한 살인 동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시험 삼아 살인을 했다고 진술했다.21)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후 한 변호사의 변론이다. 인간에게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정신 즉, 자아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자아 이전에 ‘결정되어’ 버렸다고 가정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극단의 문제 사항을 다음의 변론은 제기한다.
“저는 다음의 둘 중 하나가 리처드 로엡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이 끔찍한 죄는 그가 본래 몸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의 조상 중 누군가로부터 유래했습니다. 또는 그가 태어난 이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어졌습니다. 저는 그를 타락시킨 씨앗이 어떤 조상으로부터 왔는지 모릅니다. 또 그 씨앗이 얼마나 많은 조상들을 거쳐 로엡에게 도달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씨앗이 조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생물학자는 제가 옳음을 인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이 우주 전체에 있는 각각의 생명 원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압니다. 돌이 대양에 떨어지면 바다 속의 모든 물방울이 요동한다는 것을 압니다.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영향력이 살아있는 유기체에 작용하고 반작용하며, 그 누구도 죄의 책임을 어딘가에 고정시킬 수 없음을 압니다.
자연은 강하고 무자비합니다. 자연은 고유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우리는 그런 자연의 희생자입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 소년이 자연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 소년이 자연에 대항해서 무엇을 했어야 합니까? 그는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조부모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죗값을 치르라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함께 공모하여 로엡을 이렇게 만든 무한한 힘들 때문에, 로엡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그가 만들어지는 데 기여한 무한한 힘들 때문에, 그 무한한 힘들의 조합으로부터 그가 (감성적인 체계와 반응에서) 결함을 가진 채 태어난 것 때문에 로엡을 비난해야 하겠습니까? 그라는 기계가 완벽하지 않다고 그를 비난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나머지 우주 전체가 법칙에 종속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행동도 자연법칙의 영향과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범죄를 원인이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법률가는 범죄가 질병과 마찬가지로 원인을 가진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비정상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20세기를 살고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연이 해놓은 일 때문에, 생명이 해놓은 일 때문에, 교육이 해놓은 일 때문에 이 소년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이들이 아직도 존재합니다.”22)
위의 변론으로 변호사는 두 소년에게 놓였을 사형을 종신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변호사의 결론을 전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무엇인가 언짢은 기분이 든다. 나라는 존재는 전적으로 나 이외의 환경들로 결정되기만 한 존재일까. 흄의 말대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인상이라는 것이 불연속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러한 인상들 배후에 숨어서 “인상들을 꿰뚫는 통일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흄이 말했던 대로 상상력에 의존하여 인상들을 인과적으로 하나된 것이라고 생각해내는 인간의 습성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인상들 배후에 숨어서 통일적으로 우리의 인상과 사고와 행동을 조종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5. 칸트 - 선험적 사고 형식의 의의
본인은 그 배후의 것으로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 사고의 형식을 내세우려 한다.23)그리고 선험적 사고 형식이야말로 내 안에서 고정되고 불변되게 나를 형성하는 단 하나의 정신 즉, 자아의 핵심 근거라고 말하려 한다. 어떻게 해서 선험적 사고 형식이 통일적인 하나의 자아가 될 수 있는 지는 칸트 스스로가 말했듯 자신의 사고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비유한데서 알아 볼 수가 있다. 흄이 자아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지각의 잡다’라고 말할 때에 인식의 주인은 사물 즉, 대상이었다. 때문에 자아 안에는 통일된 형식이 없이 ‘잡다한 지각’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의 판단들이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순응해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대상이 그것들 자신의 성질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24)하지만 칸트의 선험적 사고 형식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인식은 대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경험하는 것과 함께 대상은 우리의 사고 형식이 요구하는 바를 순순히 건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칸트가 말한 인간의 사고 형식은 어떤 경험에라도 반드시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즉 우리 인식의 사고 형식은 필연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인식이 보편적이며 통일적인 선험적 사고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정초하여 다시한번 통일적인 자아를 회복할 수가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시간상으로는 먼저 대상과의 경험을 통하여 ‘지각의 잡다’를 받아들이지만, 논리상으로 앞서 있는 선험적 사고 형식을 통해 ‘지각의 잡다’를 정돈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돈된 인상들은 비록 언제나 연속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라 하더라도, 언제나 기억되기만 하면 자아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인상들만이 자아의 통제를 받는 것은 아니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간적으로는 선험적 사고 형식 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행동은, 사실은 논리적으로 앞선 선험적 사고 형식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앞서 본 사건에서 두 소년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했다고 했다. 살인 동기의 이유 없음에 근거하여 변호사는 결정론을 주장했고, 이들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누구나 선험적 사고형식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들의 이유 없음은 ‘생각을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두 소년의 사고 형식은 어느 나라의 어떤 소년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고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인 역시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역지사지하여 자신이 싫은 바와 꼭 마찬가지로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된다는 ‘윤리’를 납득할 능력이 있다 것을 실토하는 것이다.
6. 마무리
말 한대로 필자는 ‘정신’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험론의 입장에 근거하여 사람에게는 실체로서 통일된 하나의 정신이란 없고, 정신이란 ‘지각의 잡다’일 뿐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어떠한 문제가 생기는 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대안으로 칸트의 선험적 사고 형식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언급하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칸트의 선험적 사고 형식이 자아를 이루는 단 하나의 통일적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경험주의자들의 진리 즉, 사실 정신으로서의 자아란 없는 것인데 이 진리를 인정할 경우 파생되는 문제점 때문에 없는 것을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잡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상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상들은 분명히 필연적이고 통일적인 사고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사고 형식이 설령 칸트가 말한 감성의 형식이나 12범주에 모두 포괄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 통일적인 형식은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본인은 우리의 인상과 그에 입각한 행동들의 뒤에 숨어서 우리를 조종하는 통일적인 하나의 정신이 있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배후에 숨은 실체로서의 정신을 인정할 때만이, 당연한 것처럼 인정받고 있는 자유, 자유에 따른 책임, 인간의 보편적 인식, 윤리적․법률적인 인간 제반 문제들을 ‘문제’로서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다. 정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와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 by | 2007/10/29 22:13 | 학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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