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녀(蟲女)>를 보고

<충녀>를 드디어 봤다. 영화를 보고 바로 잠이 들었는데 기묘한 꿈을 꾸었다.

09.08.01~09.08.02의 꿈

'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다. <이어도>에서 본 듯한 피름 카메라를 손에 꼭 쥐고 있다. 내가 있는 영화사에는 내 위로 선배 감독들이 두 분 더 계신다. 선배 감독들의 얼굴은 불분명하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느낌이다.

갑자기, 갓난쟁이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냉장고에서 등장하지는 않았다. 태어난 지 몇달 안되어, 갓 앞니가 몇 개 나기 시작한 아이다. 그 아가가 입을 연다. 선배 감독 중 한 명에게 결혼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그 선배 감독은 나에게, 그 갓난쟁이를 배우로 삼아 영화를 찍어 오라고 명한다. 필요한 필름을 모두 제공하겠다는 조건 및 잘되면 입봉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나는 그 아이의 명을 받아, 이어도와 비슷한 광경이 느껴지는 어느 산으로 향한다.
..... 이후의 꿈-내용이 불분명하다 ......
아가가 소시의 태연으로 변해있다. '

꿈에 대한 덧.
나는 소시의 팬이 아니다. 그러나 태연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저렇게 쾌활한 사람이랑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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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 감독이 말하는 "날 것의 인간"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이 말은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고 나서 좋다고 여겨지는 점들을 참 압축적으로 전달해주기 때문이다(오승욱의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점은 이 때문인가?).

그리고 "날 것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향연"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김기영과 정일성이 합작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김기영의 흑백 영화보다는 컬러 영화!

'여왕벌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김영진 평론가는 김기영의 영화들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것들과 비교한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김 감독님의 컬러 영화들을 '스즈키 세이쥰'의 영화와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스 선생님의 매춘부 시리즈들과.

두 영화에 나오는 원색 창연한 색감들은, 하나도 세련되지 않다. 그렇지만 끈적끈적한 느낌이다. 원시부족 사회의 동굴에 들어간다거나 ㅡ그것도 주술이 행해지고 있는ㅡ, 두 남녀가 한 방에 한 달 이상 갇혀 있을 때 생겨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끈적끈적함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 속의 인간이라면 느끼지 않을 소재에 대한 집착적 공포, 도덕의 외투를 벗어버린 인간의 자연, 감정에 지배당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나약한 인간이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그러한 인간의 종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알게된다.

by 김탁구 | 2009/08/02 15:35 | 단상 | 트랙백 | 덧글(0)

인간이란

대부분의 시간을 근심속에서 살다가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매우 기뻐하는 존재

by 김탁구 | 2009/06/09 04:28 | 단상 | 트랙백 | 덧글(0)

<클루트(Klute)> (알란 J. 파큘라, 1971) - 줄단상

     관객이 보기에 신경에 거슬리는 장면들, 그러니까 '저거 꼭 누가 쳐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드는 쇼트들이, 그것이 진짜 제3자가 쳐다보고 말고랑 관계없이, 영화 속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카메라가 찍고 있는 공간을, 인물이 둥그렇게 돌아서 결국 등으로 카메라를 가리면 무척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영화.

    배우가 되고 싶은 수많은 배우지망생들의 인격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

   
<프렌치 커넥션>에서 뽀빠이 상대역으로 나왔던 배우는 조연이지만 인상적임.

by 김탁구 | 2009/06/08 20:43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시국선언

     서울대 교수 124명의 이름으로 제창된 시국선언. 정말 멋졌다. 아무리 권위있는 사람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자주있는 일이라면 식상하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국가에 정말로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때에 한 목소리를 내 주신,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은 같은 얘기라도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엘리트. 사회에는 두 가지 엘리트가 존재한다. 원래의 엘리트라는 용어는 원래 수도원에서 비롯된 말이다. 수도원에서 종교와 관련된 지식을 박학하게 갖춘 사람들을 엘리트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계승한 것으로서의 엘리트는 오늘날에도 "전문기술자" 내지는 "국가의 핵심 브레인"으로 전승되고 있다. 반면 다른 의미의 엘리트는 근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사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국가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엘리트가 새로 태어난 것이다.

     요새와 같은 시국에서는 비판의 기능을 하는 엘리트가 너무나도 절실하다. 벌써 많은 대학의 학우, 교수들이 움직이고 있다.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하고 있다. 광장에서 삼삼오오 아니 모이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집시법 위반"이라며 잡아들이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모순된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병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이 말이 들리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by 김탁구 | 2009/06/03 21:01 | 단상 | 트랙백 | 덧글(0)

남의 고통을 통해 나의 행복을 느끼지 말자.

     정말 부정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고통이 있어야 행복을 알게된다"는 말. 내가 켸켸묵은 이 논쟁거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요즘들어 내 주위에 이 말을 가지고 자기 삶을 합리화하며 그나마 만족할만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요근래 우리의 삶은 말도 안되는 '자위행위'를 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되어버리고 만것일까?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이러저러한 끔찍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보라." 혹은 "저 사람을 보니까 내 삶은 살만하네."하는 말들을 가지고 자신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한 것으로 여기는 자위행위.  말 그대로 "삶이 고단한자여, 나보다 더 낮은 자를 보라"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결핍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순간, 비교 대상이 되었던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니까, "저 사람"의 삶, 신문이나 뉴스,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삶을 송두리째 부정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사실을 보면 그 사람도 우리랑 똑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한테ㅡ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ㅡ, "당신 때문에 나도 살 용기를 얻네요"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지나치다.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면, 최소한 나같은 경우는 죽고싶은 자괴감. 인간으로서의 마/모멸감이 들어버릴 것이다. 자살로 치닫을 수도 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비교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해보라. 인간적인 치욕감이 들지 않나?


     이러한 '자위행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상태에만 있는다면 행복의 참된 의미를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르면 또 어떤가?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당신의 고통은 누군가에게 행복을 일깨워준다는 점만으로도 소중한 것입니다/신의 은총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서,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는 것이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행복의 참된 의미를 몰라도 좋다. 그저 고통이 없으면 좋겠다. 나의 고통이든 남의 고통이든, 끔찍한 고통을 보고 있기란 너무 힘들다. 또한, 최고로 완벽한 상태는 결핍이 없는 상태라는 격언을 따른다고 할때, 최선의 행복은 그것이 행복한건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나의 바램을 두고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 반증들을 제시한다. "미꾸라지들을 봐라. 미꾸라지들만 수조 속에 넣어놓으면 생명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천적을 함께 넣어둔다면 미꾸라지들을 훨씬 더 건강하고 오래살게된다." 적당한 긴장, 적당한 고통은 삶에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맹목적인 건강, 맹목적인 삶의 연장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위대한 선현들은 삶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다. 삶이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맹목적으로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르주아의 배부른 허영에서 비롯된 망발이 아닐까? 모두가 행복에 겨워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더라도, 안일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더라도 좋다. 아니, 단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행복에 겨워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사는 세계에서 꼭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란 법도 없지 않은가? 뭔가 상향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세계가 올 수 있지는 않을까? 행복이 결핍된 느낌은 없지만, "이걸 하면 더 좋겠다"하는 생각은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뭔가 창조적인 일을 모두가 하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게으르고 나태함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산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될지는 전적으로 까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점 때문에 빌빌대는 나의 친구들. 뭣때문인지도 모른체 열심히 공부하는 초.중.고 학생들. 통장 잔고를 불리기 위해 열심히 회사에 나가는 지인들. 미국 역시 한국의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오바마. 이런 사례들을 보면, 차라리 행복에 겨워 행복이 뭔지도 모른채 사는 게 차악은 될 것같다. 우리가 대체 언제부터 적당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살게되었는가? 우리에게 최선의 가치는 재산의 규모가 되어버렸다. 황폐한 "재산 규모-잣대"를 어떻게 하면 뒤짚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고통을 통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겨워 행복 역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해체주의에 경도되어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해체주의의 완성은 자신의 가치 체계를 완성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목적론에 빠지지 않고도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또 목적론이면 또 어떻나? 자기가 규칙을 부여하고, 또 그것이 만인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런 목적론은 최악은 아니다. 지금보다는 낫다. 일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악을 피해 차악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남의 삶을 짓밟을 때라야 만이 자신의 행복을 깨닫을 수밖에 없는 시대,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행복만이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사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쩌겠나. 그래도 사는 게 이기는 거다. 그래도 슬픔에 겨워서 남긴다.


by 김탁구 | 2009/06/02 20:57 | 단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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